[기자수첩] 1000개의 계단

  • 송고 2020.07.31 14:54
  • 수정 2020.08.07 23:24
  • EBN 이윤형 기자 (y_bro_@e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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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형 기자/금융증권부

이윤형 기자/금융증권부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 정착된 신용평가 체계는 통상 10등급에서 많게는 15등급의 신용등급제로 구성됐다. 주로 대출 규모나 연체 정보를 통한 단순 평가에 따라 고신용(1~3등급), 중신용(4~6등급), 저신용(7~10등급)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신용등급제도는 가계와 자영업자의 등급이 낮을수록 대출 승인이 나지 않는 경우가 늘거나 승인이 나더라도 금리가 올라가는 등 대출자 입장에서도 적잖은 불이익이 발생해왔다.


점수가 7등급 상위에 해당해 6등급 하위와 비슷한데도 7등급 소비자들은 제1금융권이 아닌 제2금융권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등급 간 '절벽효과'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등급제를 점수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단계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 내년부터는 신용평가 점수제 전환을 위한 법령 개정을 끝내고 1~10등급 개인신용평가 체계에서 1000점 만점의 점수제를 모든 업종에 적용하기로 했다.


정부는 점수제가 도입되면 여신승인이나 대출 기한연장 심사, 금리 결정 등이 보다 유연화 되고 세분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점수제는 1000점 만점에 1점 단위로 매겨져 보다 정밀하게 신용을 진단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출 절벽을 오를 수 있는 1000개의 계단이 만들어진 셈이다.


금융연구원은 지난 2018년 등급제 때문에 평가상 불이익을 받는 소비자가 약 240만명에 달하고, 점수제로 전환되면 연 1%포인트 수준의 금리 절감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기대효과가 크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험대에 올라있다. 점수제로 해도 컷오프라인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용평가 점수제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정밀한 신용 진단을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된 만큼 대출 상품도 세분화 돼야 한다. 평가 제도가 1000개로 쪼개졌는데, 상품체계는 10개 등급제로 고정돼있다면 새로운 제도는 아무소용 없을뿐더러 오히려 점수 한점한점이 새로운 문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금융사별 내부 신용평가시스템(CSS)도 조속히 마련돼야한다. 우선 신용정보회사(CB사)로부터 신용점수를 제공받아 이를 토대로 리스크 전략을 감안한 자체 신용위험평가를 실시해야 하는 과정이 핵심이다. 문제는 각 금융사마다 계약을 맺은 CB사와의 등급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공통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CB사별로 수집하는 정보의 범위와 보유량, 신용평가에 반영하는 요소와 비중이 다르다. 동일인이라도 CB사에 따라 신용점수가 다른 것이 이 이유 때문이다.


CB사마다 다른 기준이 어느 정도 취합돼서 금융사로 넘어가야 가이드라인을 구성할 수 있는데, 이 절차가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이드라인은 물론 CSS, 내규, 표준약관을 올해 안에 마련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금융당국이 기존 10등급 단위 신용등급제를 1000점 단위의 신용점수제로 전환하기로 한 이유는 갈수록 다양화하는 대출 상품 유형을 현재의 신용평가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제도 지체'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평가제도가 상품 유형보다 앞서나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예상되고 있다.


대출 절벽 등 금융 소비자의 불이익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는 하루라도 빨리 도입돼야 하는 속도도 중요하지만, 하위 제도와 대출 상품 유형과 합을 맞출 수 있는 정확성이 없다면 졸속 처리에 불과하다. 신용평가 점수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보완책 마련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점수제는 1000등급제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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