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 어 라마(Vote-a-rama)’.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2024 세계대전망>에서 밝힌 2024년 주목해야 할 10가지 주제 중 첫 번째 주제다.
우리에겐 생경한 이 용어는 미국 상원에서 법안의 최종 표결에 앞서 의원들이 수정안을 무제한으로 제출할 수 있는 절차를 의미한다고 한다.
올해 전 세계에서 70여건의 선거가 치러진다. 선거가 끝나면 지구촌 어디선가는 또다른 선거가 치러지는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연쇄적으로 치러지는 이같은 선거 상황을 ‘보트 어 라마(미국에서 상원에서 예산안 수정안을 발의할 수 있는 절차)’에 비유했다.
2024년 세계 경제의 가장 큰 변수는 물가도, 금리도, 유동성도 아닌 ‘정치’다. 올해 선거에 노출된 인원은 40억명. 사상 최초로 세계인구의 절반이 선거를 치른다. 투표율을 고려해 볼 때 투표장에 향하는 인원은 적어도 20억명에 이른다. 이에 영국의 가디언은 ‘민주주의의 슈퍼볼’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국 최대 스포츠 행사이자 챔피언을 가리는 슈퍼볼에 빗댄 것이다.
그냥 선거만 많은 것이 아니라 중요한 선거가 많다. 당장 이달부터 시작된다. 오는 13일 치러지는 대만의 총통·입법위원 선거는 사실상 미·중 대리전으로 불린다.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민주 진보당이냐, 친중성향의 국민당이냐에 따라 향후 양안 관계(대만과 중국의 관계)가 달라지고,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2월 14일(현지시각)에는 인도네시아의 총선과 대선이 열린다. 3선으로 연임제한에 걸린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후계자가 선출되는 데 지도자 교체에 따른 ‘글로벌사우스’의 정책변화가 예상된다. 3월 17일(현지 시간)에는 러시아 대선이 열린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재선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여론조사에서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85%에 달한다. 재선은 무난해 보이지만 공약 과정에서 대우크라이나 전략이 달라질 수 있다.
4~5월에는 인도에서 총선이 열린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3선 여부가 걸려있는 선거다. 최근 인도의 지경학적 영향력을 볼 때 선거결과가 불러올 파장은 예상보다 클 수 있다. 대미, 대중 전략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6월9일(현지 시각)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서는 극우 정당들이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올해 100만명이 넘는 이민자가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면서 EU 국가들의 우경화 움직임이 가파르다. 가장 큰 선거는 역시 11월 미국 대선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이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냐에 따라 국제 질서는 요동칠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도 4월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국민들이 국정안정에 힘을 실어줄지, 견제를 택할지에 따라 미중일 외교전략과 대북전략, 거시경제 정책에 변화가 올 수 있다.
오랫동안 정치와 경제를 묶는 것은 금기시됐다. 정경유착의 폐해를 겪은 한국사회는 특히 정치와 경제의 결합을 경계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한 이후에 정경분리는 사실상 글로벌 스탠다가 됐다. 이념보다는 실리가, 성향보다는 가격이 우선됐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고, 바이든 행정부가 공급망 재편에 나서면서 정치와 경제는 가까워지고 있다.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끼리만 거래하겠다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은 과거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개념이다.
올해 한국기업들은 비용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 때문에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대만 위협 등도 정치가 경제에 앞설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준 계기가 됐다. 러시아 경제상황 등을 비추어 볼때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예견한 서구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때 정치와 경제는 한몸이었다. 국가와 국민의 부를 키우는데 정치 행위가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정치 행위와 경제이론간 상관관계 연구는 초기 경제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19세기 말 태동했던 경제학의 첫 이름이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큰 만큼 올해는 여느 때보다 경제정책을 유연히 가져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외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적군과 아군을 나누는 이분법 사고는 피하는 게 좋아 보인다. 하나의 정답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다 권력 지형에 변화가 생기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여 년 만에 정치경제학의 시대가 귀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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